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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눈밤] 여름잠

비오는 날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을 설친게 며칠 째 외출에는 기상청을 먼저 살펴보는 나날이 이어졌다. 몇 번이고 깨던 잠을 붙잡다가 아침에 정신없이 일어나 입에 시리얼을 넣고서 밖을 나서는데 여김 없이 비가 오고 있었다. 해가 너무 쨍쨍하여 햇볕가리개로나 사용해야하나 고민했던 모란설이 준 우산은 그 역할을 톡톡히 하는 요긴한 친구가 되었다. 젖은 우산을 든 채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기자 습관처럼 정원에 도착해있다. 밖과 달리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이 쾌청한 날씨를 유지하고 있는 정원에 혼자 질퍽한 발자국을 남기며 돌아다니고 있으니 깨끗한 장소를 더럽히고 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물론 이런 감정이 들게 하면서도 무의식으로 스스로를 이곳으로 이끈 그는 여전히 자고 있다.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다. 음식 하나를 이야기 하는 시간에 하루를 넘게 할애할 정도로 함께 하는 순간이 감쪽같이 지나가곤 해서 만남이 습관이 되는 시점에도 모르는게 많은 사이다. 그렇지만 여름잠 이라는건 흘려서도 말해주지 않았잖아. 모란설이 자고 있는 장소에 들어가자 절로 투정이 나왔다. 몇 번 오가며 남겨두었던 메모, 가지런한 책 몇 권, 얇은 천 뒤로 보이는 동그란 얼굴. 우산을 둘 곳을 찾으러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지나간 자리마다 생긴 물 흔적만 저번에 다녀 간 뒤의 방의 모습과 다르게 나타났다. 물기를 치우고 자리를 잡고 주저앉자 정신이 차려졌다. 또 여기에 왔어. 처음은 아가씨의 권유였고 첫 인상 역시 조용한 환경에 좋았지만 자연스레 자리를 잡을 만큼 흔해진 장소가 된 까닭은 저 천 너머의 잠꾸러기의 영향이 크다. 곰이 겨울을 잠으로 보내는 것처럼 눈요정은 잠으로 여름을 지낸다는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감기도 걸리지 않는 존재가 갑작스럽게 잠들어 버린 몸을 보며 놀라다가 말 한마디 안해준 상대가 얄미웠다. 걱정도 했다. 조금.

잠꾸러기 여름곰 친구와 알게 되고 얼마 안되었을 즈음에 진눈깨비를 맞아 감기에 걸렸었다. 한 동안 보지 못했다며 무슨 일 있었냐고 서로에 대한 근황을 나누던 와중에 그 아이는 눈을 뿌리다 보니 멀리 다녀왔다고 웃으며 이야기 했고 나는 비에 맞아 감기에 걸려서 조금 앓았다고 답했다.

“아침부터 하늘이 뿌옇더니 결국 진눈깨비가 내리더라고”

“비라고 하지 않았어?”

“진눈깨비는 눈비니까.”

"내가 있었다면 아프지 않았을 거야."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니 제 곁에 있으면 눈과 비는 맞지 않으니 아프지 않았을 거라고 웃었던 얼굴이 시무룩하게 바뀌어 걱정을 비추었다. 우산은 왜 쓰지 않았냐고 물어서 우산 파는 곳이 없어 맞고 왔다. 하니 제 이름을 부르면 네게 갔을 텐데 이름을 불러 달라 하기에 또 그냥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고서 며칠 후 봄비 답지 않은 장대비가 내리는 날. 갑작스러운 비에 다들 어수선 하게 움직이며 한 우산에 서로가 서로를 지탱한 채 움직이는걸 멍하니 보고 있었다. 시간이 가도 비가 멎지 않아 몸을 일으켜 움직였는데 비가 한 발자국 멀리서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백야-”

내가 있으니 아프지 않을거라며 얼굴 가득 즐거운 웃음을 띈 네가 장식같은 우산을 들고 있었다. 머릿속을 물음표로 채운 내가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자 무엇이 의아하냐며 웃음짓던 얼굴이 왜 제 이름을 부르지 않았냐. 비 오는 날 마중은 처음 해본다. 오늘의 마카롱 맛은 말차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비가 내리던 그 날 대답한 건 말차 맛 마카롱보다 유자가 더 좋다는 이야기를 하며 조용히 지나갔다.

응, 비 오는 날 마중 받아본 건 나도 처음이고 네 이름을 불러도 오지 않을까 무서웠어. 오늘 비는 무섭게 내리진 않는데 이 빗속에 들어가면 네가 일어날까. 그런 생각을 입안에 삼킨 채 우산그림을 그려놓았다. 여름잠은 지겹고 외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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